[다시보는 신앙의 삶] 과연 한국 최초 서양인 선교사는?

이부평 기자 | 기사입력 2020/10/04 [19:36]

[다시보는 신앙의 삶] 과연 한국 최초 서양인 선교사는?

이부평 기자 | 입력 : 2020/10/04 [19:36]

▲ 아펜젤러 선교사  ©


[청솔뉴스=이부평 기자] 아펜젤러(Henry G. Apenzeller)는 1878년 프랭클린 마샬대학을 졸업하고 드루신학교에서 수학하고, 1881년경부터 인도선교의 비전을 갖고 있던 중 파울러 감독의 요청으로 선교지를 한국으로 정하여 1885년 2월 1일 스크랜튼, 언더우드와 더불어 부산에 4월 2일에 도착하였고,  4월 5일 부활주일에 제물포 항구를 통하여 입국했다.

 

1885년 4월5일 제물포(인천)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사망의 권세를 이긴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 했다.

 

아펜젤러는  17년동안 배재학당을 시작으로 이화학당, 정동교회를 차례로 설립하는 등 학원선교 및 목회에 열중했으며, 배재학당은 1885년 8월에 한옥을 매입하여 4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였으며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이라는 명을 하사 받았다.

 

이화학당에서는 스크랜튼 부인의 주도로 주로 고아나 과부와 같은 소외 계층으로부터 시작하여 교육선교를 시작하였고 여성의 지위향상과 복음사역에 충실한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여학교였다.

 

또 아펜젤러는 1888년에 1월에 배재학당의 교사로 입국한 올링거 목사의 도움으로 배재학당 내에 삼문(三文) 출판사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한·중·영의 삼국어로 인쇄할 수 있는 출판사였다.

 

여기에서 신문, 잡지 등 정기간행물 특히 격주간지 [교회](1889년 5월)의 발간으로 신앙의 교제와 소식을 나누었고, 영문 월간지 Korean Re- pository(1892년 1월)는 폐쇄적인 한국사회를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는 5권까지 발행되었으며, 지금까지 한국사회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료로 되어있다.

 

1902년 6월 11일 밤 10시경 , 아펜젤러와 그의 조수겸 비서 조한규, 서울에 있던 장로교학생으로서 집으로 돌아가던 한 여학생 등과 함께 목포로 항해하는 오사카 선박회사의 쿠마가와 마루호에 승선하여 항해하고 있었고,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회의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항해하던 배가 어청도 부근을 지나던 중 키소가와로 이름 붙여진 다른 선박과 일행이 타고 있던 배가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배가 침몰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배를 버리고 탈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비서 조한규가 미처 선실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고  아펜젤러는 그를 구하기 위해 침몰하는 배의 선실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배는 아펜젤러를 비롯한 23명과 함께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아펜젤러의 장례식은 1902년 6월 29일 주일에 치뤄졌는데 장례식에서는 이 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한 차원에서, 그리고 민족 구원을 위한 애국 애족활동을 기리기 위해 애국가가 불려졌고 태극기가 게양됐다.

 

▲ 칼  퀴츨르프  ©


독일 사람인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 1803~1851)는 1866년에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보다 34년, 1884년에 인천항을 통해 입국한 의료선교사 알렌보다 52년, 1885년 입국한 미국 선교사인 언더우드, 아펜젤러 보다 53년이나 앞서 1832년 조선을 선교하기 위해 방문한 인물이다.

 

귀츨라프는 한글로 주기도문 번역을 시도한 최초의 인물이라는 사실에 더 많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그는 성경에 나오는 ‘주기도문’을 한문으로 써주고 그것을 한글로 번역한 것. 이는 단편적이지만 한글 성경 번역의 효시라 불릴 만한 일로 여겨진다.

 

또한 귀츨라프는 가는 곳마다 조선인들이 읽을 수 있는 한문으로 된 성경이나 한문 전도 서적을 나누어 주었으며, 순조 대왕에게는 로버트 모리슨과 밀른 선교사가 번역한 한문성경인 신천성서(神天聖書)를 진상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조선이 한자 문화권임에도 불구하고 조선만의 문자인 한글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것을 배워서 최초로 서양에 체계적이고 학술적으로 한글을 소개하여 세계에 알렸다. 그의 영문 소논문 ‘한글에 대한 소견’은 영어권은 물론 독일어로 일부 번역되어 독일어권에 소개되어 한글의 독창성과 과학성을 널리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그는 먹을거리가 제대로 없어 곤궁한 조선인들을 위해 서양감자를 심고 재배하는 법을 실제로 조선인들의 눈앞에서 보여 주었고, 글로 써 남겨 주었다(1832년 7월 30일). 또한 야생 포도로 음료를 만드는 법을 전수했다(1832년 7월 31일).

 

귀츨라프는 충청도 기착지인 고대도 도착(1832년 7월 25일) 이후 줄곧 환자들을 위해 약을 처방했다. 한 예로 60명의 노인 감기환자를 위한 충분한 약도 처방(1832년 8월 2일)했는데 이 기록은 조선에서 서양 선교사가 최초의 서양 의술을 베푼 기록이다.

 

귀츨라프 선교사 일행은 1832년 7월 17일 장산(장산곶)에 도착한 후 22일 녹도(록도) 근처 불모도(불모도)를 거쳐 25일 충남 보령시 오천면에 소재한 고대도에 정박했다. 그들은 홍주 목사 이민회 등의 관리들을 만나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조선 국왕에게 정식으로 통상을 청원하는 서한과 한문 성경을 비롯한 26종의 책자와 망원경을 비롯한 많은 선물을 순조 임금에게 진상하도록 전달했다.

 

그리고 조정의 회답을 기다리는 동안 고대도에 20일을 머물면서 주민들에게 한문 성경과 전도문서와 서적 및 약품을 나눠주고, 감자를 심어주고, 감자와 포도주 재배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가르쳐 주고, 한글 자모를 받아 적은 다음 후에 이를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 호러스 알렌 선교사  ©


호러스 알렌(Horace Newton Allen)는 미국의 북장로교 선교사로 1884년 9월 20일 인천에 도착했던 한국 서양선교사다. 그때 나이가 26세였다. 그리고 1905년 6월 9일 그의 나이 47세 때 한국을 떠나 미국 토레도시에 살다가 1932년 12월 11일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만 21년을 머문 셈이다.

 

하지만 그의 생애 가운데 황금기는 한국에서 보낸 21년이었다. 그 외 여생은 이렇다 할 기록이 없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 역시 한국에서의 선교활동과 외교 사역이었다. 그것을 위해서 그는 세상에 왔다가 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한국이 서양의 여러 나라들과 수교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1882년 5월 한미수호조약이 효시다. 미국과는 조약이 있기 16년 전부터 여러 차례 교섭이 있었다. 영국인 로버트 토마스 목사가 대동강에서 순교했을 때 불에 탄 상선이 미국 선적이었기 때문이다.

 

미국과 가장 먼저 수교할 수 있었던 데는 이 같은 여러 차례의 만남이 영향을 미쳤다. 미국과 수호조약이 있던 해에 한불조약, 한영조약, 한독조약 등이 잇따라 맺어지면서 한국은 세계의 일원으로 첫발을 내딛고 있었다. 앞서 일본과는 6년 전인 1876년 2월에 굴욕적인 수교조약을 맺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해에 임오군란이 터졌다. 일본공사관을 한국군이 습격하고 일본과 내통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은 민비가 변장을 하고 충주로 피난을 가는 난리가 일어나 앞이 캄캄하던 때였다. 얼마 후 일본은 우리 조정을 위협, 제물포조약을 통해 배상금 등으로 당시로선 거액인 55만원을 보상받았다. 실로 국가의 운명이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로운 때였다.

 

그런데 미국은 우리 한국에 꿈과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1883년 정월 한미수호조약이 비준되자 첫 주한공사로 푸트를 임명했다. 그런데 그 주한공사관의 위격이 북경의 미국공사관 위격과 같았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하늘처럼 보이던 청나라 북경이 미국에서는 한국 서울과 동격으로 취급된 것이다. 이것은 천지개벽과 같은 변이었다. ‘청국과 한국이 같다!’ 이것을 1883년 정월에 미국이 해낸 것이다. 그렇게 인정해 준 것이 미국이다.

 

그뿐 아니었다. 미국 정부는 한국에서 파견한 보빙사 민영익 일행이 귀국할 때에 미국 해군의 거대군함 트렌턴호에 태워 인천까지 보내주었다. 미국정부가 극동의 작은 나라 한국에 대해서 보였던 이런 태도는 역사적으로 묘하게 계속된다.

 

알렌은 한국에서 근대식 병원과 학교를 처음 시작했다. 또 조정과 가까워지면서 선교사들이 대거 입국할 수 있도록 돕는 ‘입국통로’ 역할을 담당한다. 그는 한국에서 안련(安連)이라 불렸는데 묘하다. 선교사들 입국의 길을 ‘안전하게 연결시켜 주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조정과 아주 친근하게 지내게 되고, 고종을 도와 한국이 국제사회에 진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입국한 지 6년 만에 미국 외교관으로 신분을 바꾼다. 그리고 1905년 을사늑약으로 한국이 국가 신분을 잃어 공사직에서 해임되고 미국에 돌아갈 때까지, 끝까지 한국을 위해 근대화 사역과 반일 친한의 강경책을 밀고나가는 데 앞장선다.

 

알렌은 한국의 근대화 과정 초창기부터 우리 곁을 지켰다. 우리 한국의 국익을 위해서, 더러는 동료 선교사들의 핀잔을 사기도 하고, 더러는 본국 정부와 갈등과 불신에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일관된 헌신을 보여줬다.

 

알렌 선교사는 1858년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에서 미국 독립전쟁의 영웅 이탄 알렌의 후손으로 출생했다. 웨슬리언대 신학부와 마이애미대 의대를 졸업한 뒤 25세 때인 1883년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중국에 파송됐다. 이듬해 9월 20일 한국땅을 처음 밟은 그는 1905년 한국을 떠날 때까지 제중원 및 세브란스 병원 설립 등 의료선교사 및 외교관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32년 고향인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 도배방지 이미지

관련기사목록
포토/영상
금산군 부리면 가을걷이
1/6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